1972년 11월29일 놀런 부시넬, 게임대중화 첫발 내딛다
■태초에 ‘테니스포투(Tennis for Two)’가 있었다
2008년 10월18일 뉴욕 브룩헤이븐연구소. 이 곳을 방문해 긴 줄을 선 뉴요커들은 커다랗게 투영된 스크린에서 스크린에 뜬 원 안쪽의 흰점이 오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 게임기를 보려고 줄을 서고 있었다. 행사모습은 꼭 50년 전인 1958년 10월18일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뉴욕국립연구소 계측연구부의 물리학자였던 윌리엄 히긴보섬(William Higinbotham)이 세계최초로 선보였던 한 발명품을 보기위해 몰려든 인파였다.
그것은 지름 5인치(12.5cm)인 커피잔 받침 크기 만한 동그란 오실로스코프 안 중앙에 있는 하얀점을 좌우를 가르는 수직선(네트) 좌우로 받아넘기는 게임이었다.
원형 오실로스코프 안에서 흰색 공을 컨트롤러로 조작해 받아넘기도록 한 이 게임의 이름은 ‘두사람을 위한 테니스’, 즉, ‘테니스포투(Tennis for Two)’였다.
원폭개발계획인 맨해튼 계획에도 참여했던 핵물리학자 윌리엄 히긴보섬은 과학관찾기에 따분해져 있는 관람객들을 위해 뭔가 신기한 것을 만들어 무료함을 덜어주고자 했다.
사람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아케이드게임장이나 롤러스케이트장 등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곳 전시물들은 너무나도 정적이고 관객들과의 양방향 교신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놀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 놓으면 우리 과학자들의 노력이 일반사람들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거야.”
히긴보섬은 브룩클린연구소의 컴퓨터로 미사일유도탄의 궤도를 계산해 냈다. 테니스코트처럼 시뮬레이션된 녹색 유리 원안에서 오가는 흰점(공)을 그래픽으로 구현하기 위한 디스플레이로 오실로스코프가 사용됐다.
그 가 설계한 회로는 마치 실제 테니스 공처럼 원형 오실로스코프 안에서 오가는 하얀빛의 꼬리까지 표현할 수 있었다. 게이머는 알루미늄으로 된 컨트롤러를 이용해 공을 칠 수 있었다. 버튼을 클릭하면 공을 칠 수 있고 손잡이를 제어해 각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는 약 2시간 만에 설계를 마치고 3주 만에 이 기기를 조립해 냈다.
테니스포투의 두뇌는 작은 아날로그컴퓨터의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컴퓨터 강의 책을 사서 보고는 어떻게 하면 오실로스코프에서 다양한 곡선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알아냈다. 비밀은 저항기,축전기,릴레이를 사용하는데 있었다.
특 히 이 게임기의 진정한 기술혁신은 막 상용화된 새로운 게르마늄 트랜지스터의 사용에 있었다. 히긴보섬은 빠르게 회로를 접속했다 끊을 수 있도록 트랜지스터를 사용했고 이는 브라운관(CRT)으로 된 오실로스코프 안의 컴퓨터, 디스플레이,스크린등 3개의 출력점에서 36Hz 빠른 속도로 불타는 듯 타오르는 흰색공을 만들어 내게 해 주었다.
이후 이 게임기는 뉴욕브룩헤이븐 연구소를 찾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물론 그의 단순한 호기심이 만들어 낸 결과였던 만큼 상용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물리학자 히긴보섬에게 이 게임기가 세계최초의 비디오게임기가 되리라는 생각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그런 비디오 게임은 이후 미국내에서만 연간매출 95억달러짜리 게임산업으로 커지게 될 터였다.
■스페이스워-크고 값비싼 미니컴퓨터로 구현한 게임
1960년대 초. 미국에서는 흑백TV와 함께 핀볼이라는 게임이 내내 사람들의 오락거리로 절정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매 사추세츠공대(MIT)에서는 막 도입된 디지털이큅먼트(DEC)사의 미니컴퓨터를 이용한 해커들이 컴퓨터를 활용하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장차 MIT 인공지능연구소를 만들게 될 이 대학의 한 해커가 미니컴퓨터를 조작해 모니터에 나선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그가 실수로 컴퓨터 오실로스코프 상에 만든 것은 나선 대신 원형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 이 청년 해커는 이 원형 알고리듬을 이용해 세 개의 조각들이 서로 간섭을 일으키면서 스크린에 환상적이고 소용돌이 치는 양식을 만들어내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로라면 이 발견은 사장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에 감명받은 사람 중에 그의 친구인 해커 스티븐 러셀(Stephen H.Russel)이 있었다. SF팬인 그는 이 모니터를 보고는 자신이 최근 보고 있는 E E독 스미스의 소설기반의 우주드라마를 떠올렸다.
“이 12만달러짜리 컴퓨터와 우주를 무대로 한 서부극 ‘스페이스오페라’라는 SF드라마를 결합시킬 수 있다면......”
러
셀은 민스키트론으로 이름붙인 이 모니터 상에서 생성되는 형상을 바라보면서 이 새로운 무늬가 변화되는 것을 보기 위해 수없이
스위치를 조작해 보았다. 모니터 스크린에서는 환상적이고 소용돌이치는 양식이 만들어지고 이때 다양한 궤적이 스스로 생성되고 있었다.
1961년말 러셀은 마침내 몇 달간 쥐고 있던 이 알고리즘을 이용해 게임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는 이듬해로 이어졌다. 마침내 러셀은 스크린상에 자기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점 하나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제어판 위에 있는 작은 토글(빗장)스위치를 조작함으로써 누구든지 이 점의 속도를 높이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이어 만든 것은 두 대의 로켓 우주선 형상이었다. 두 대 모두 끝이 뾰족하고 아랫 부분에 꼬리날개가 있는 만화에 등장하는 것 같은 전형적인 로켓의 모습이었다.
구 분을 위해 첫 번째 것은 통통한 시가 모양에 중간부분을 볼록하게 만들고, 두 번째 로켓은 얇은 튜브모양으로 만들었다. 컴퓨터의 스위치를 조작해서 로켓머리부분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컴퓨터는 미사일과 적 우주선의 위치를 검사할 수 있게 됐다. 만일 두 로켓이 같은 지점에서 마주치게 되면 프로그램에서 우주선을 이리저리 흩어지는 파편 형상으로 바꾸어 우주선이 폭발하는 모습을 불러냈다.
피터 샘슨이라는 해커가 이 우주전쟁게임의 배경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스스로 게임의 배경으로 설정된 우주공간에 임의로 배열된 별을 나타내는 점들을 15등급이상의 별자리가 표현되도록 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깔아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하늘이 장엄하게 이동되도록 만들었다.
1962년 5월 MIT연례행사인 오픈하우스에서 해커들은 디지털이큅먼트(DEC)사의 미니컴퓨터PDP-1의 어셈블리어코드로 작성된 27쪽에 달하는 종이테이프를 컴퓨터에 공급했다. 그리고는 특별한 디스플레이를 가동시켰다. 매사추세츠 공대생 스티븐 러셀(Stephen Russel)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스페이스 워는 오실로스프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래픽을 사용했고 두사람이 서로의 우주선을 향해 레이저를 쏘아대는 간단한 게임이었다. 이 게임이 컴퓨터실에 있던 DEC사의 메인프레임(PDP-1)기종으로 실현한 세계최초의 디지털 비디오 게임이었다.
이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을 즐겼던 사람 중 하나가 유타대의 학부생 놀런 부시넬(Nolan Bushnell)이었다. 학교컴퓨터실에서 ‘스페이스워(Space War)’를 즐겼던 그는 자신이 스스로 게임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재학시절에 스페이스워를 즐기던 놀런 부시넬 게임사업에 눈뜨다
“이게 뭐야, 너무 복잡하잖아?“
1972년 설립된 게임업체 아타리(Atari)사가 기대 속에 개발해 내놓은 스페이스워를 변형시켜 만든 게임기에 대한 반응은 시큰둥했다.
창
업자 놀런 부시넬(Nolan Bushnell)이 재학시절 즐기던 스페이스워 게임의 경험을 살려 애쓴 끝에 만든 것이었다. 이전까지
못보던 ‘컴퓨터스페이스’라는 오락실용 비디오게임기는 신기한 발명품이긴 했다. 하지만 당대를 풍미하던 흑백TV와 핀볼게임에 이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녹음기 회사 암펙스(Ampex) 출신의 청년 놀런 부시넬이 7년 전 대학재학시 스페이스워를 조작하고 즐기던 경험을 살려 만든 게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그는 암펙스 시절 동료였던 테드 대브니(Ted Dabney)와 의기투합, 각각 250달러씩 투자해 아타리를 창업해 이끌어 오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컴퓨터스페이스‘게임기는 대형 실패작이 됐다.
이 비디오게임은 60년대 유행인 핀볼 게임을 즐기던 당시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하기엔 너무 복잡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너무나도 획기적이었다.
누구나 손쉽게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을 만큼 기기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놀런 부시넬 뿐만이 아니었다.
그 에 앞서 이미 방위산업체인 샌더스 어소시에이츠의 엔지니어로 일하는 랄프 베어(Ralph H. Baer)가 가정용 비디오게임기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66년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게임시스템에 착안한 랄프 베어는 공을 치는 게임인 이른바 ‘볼-앤-패들(Ball-and-Paddle)’이란 TV게임을 만들었다. 그는 이 게임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있는 마그나복스라는 스피커업체에 넘겼다. 그리고 그 발명품은 오딧세이라는 세계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로 상품화돼 전시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돼 나가기 시작했다.
“앗, 저거다.”
마그나 복스의 행사 가운데 하나가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근처의 작은 마을 벌링검에서 열렸을 때 마침 이곳을 방문한 부시넬이 오딧세이의 볼앤패들 게임에 사로잡혔다.
■ “GE에 게임기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구...”
1972년 6월 24일 회사를 설립한 창업자 놀런 부시넬은 앨런 앨콘(Alan Alcorn)이란 젊은 엔지니어를 고용했다.
그의 생각은 자사의 게임아이디어를 다른 회사에 라이선스방식으로 파는 것이었다. 그의 첫 번째 라이선스계약 상대는 운전게임을 만드는 발리테크놀로지란 회사였다.
그러던 어느날 부시넬은 앨런 앨콘에게 뜻밖의 계약계약을 알리고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GE와 제품을 만들어 주기로 계약을 했다네. 하나의 점과 두 개의 패들이 있는 게임을 만들어주게. 점수판도 있어야 되겠고... ”
거짓말이었다. 부시넬은 이 회사에 오기 전 게임을 만들어 본 적 없는 앨런 앨콘에게 시험작을 만들게 할 요량이었다.
그
는 이렇게 앨런 앨콘에게 볼-앤-패들게임 개발 임무를 맡겼다. 게임은 정말로 간단했다. 한쪽 끝에는 약 2.5cm 정도의 하얀
패들(paddle·배의 노)형태의 막대기가 있었다. 화면 중앙에 공하나가 나타나면 패들을 이용해 이 공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보내는 것이었다.
게임은 그의 생각보다 엄청나게 느렸다.
앨콘과 그의 동료들은 이 게임기에다 스페이스워에는 없던 음향효과를 덧붙였다.
앨콘은 부시넬의 이전 개발품인 ‘컴퓨터 스페이스’를 검토해 본 결과 너무 불명료하고 기본적으로 너무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이 게임에 더욱더 호소력을 주고자 한 그는 공이 돌아오는 제어손잡이(패들)를 8개로 나누어 공이 돌아오는 각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패들의 중앙 부분은 공을 90도의 각도로 되돌려 보냈다. 패들 바깥눈금은 좀더 작은 각도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또 공은 어떤 경우에도 게임화면 꼭대기로 가지는 않도록 했다.
“음향효과를 더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앨 콘이 3개월 만에 새 개발품을 내놓자 부시넬이 실질적인 음향효과와 환호하는 군중의 소리를 요구했다. 공동창업자인 대브니는 ‘퐁(boo)’,그리고 ‘슉(hiss)’하는 소리를 게임에 추가해 달라고 말했다. 사실 앨콘은 그 방법을 몰라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동기신호발생기(sync generator)를 이용해 게임에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앨콘은 근처 가게에서 일본 히타치사가 만든 흑백TV세트를 구해서 1.2미터짜리 높이의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된 상자로 둘러싸 아케이드게임의 형태를 갖추었다.
‘퐁 (Pong)'이란 전설적 게임의 탄생이었다. 패들이 공을 맞출 때마다 나는 소리는 “퐁!”하는 바로 그 소리였다. 원래 이 게임이름은 ’핑퐁(Ping Pong)'이긴 했지만 이미 저작권을 보호를 받고 있어 퐁으로 쓸 수 밖에 없었다.
■1972년 서니베일 선술집에서의 대박 예감
1972년 11월29일 캘리포니아 서니베일 엘 카미노 리얼의 한 선술집. 각종 오락기기가 있는 테이블 사이로 아타리사의 ‘퐁(Pong)'이 설치됐다.
당장 그날 밤 이 아케이드 게임기가 설치된 선술집 앤디캡스태번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단골 손님이 게임기 앞으로 다가갔고 화면의 여기저기를 튀어 다니는 공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한 친구가 게임에 동참했다.
이들 가운데 한사람이 25센트 동전을 넣자 “삐” 하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공이 화면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매번 공이 움직일 때마다 점수가 변했다.
게임이 끝날때까지 “퐁” 소리는 바에 울려퍼졌고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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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앤디캡스 태번 앞에는 가게문을 여는 아침 10시도 되기 전에 퐁게임을 하려는 사람들이 보였다. .
“정말 이상한 일이야. 내가 오늘 아침 바의 문을 열려고 하고 있는데 두세명이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더군. 이 사람들 이 게임을 하려고 했던 거야. 아무것도 사려고 하지 않았지. 이전에 이런 건 본 적이 없다니까...”
선술집의 매니저 빌 개티스가 전한 말이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게임기기 고장나는 일이 발생했고 이 사실은 앨콘에게도 전해졌다. 앨콘이 검사해 보니 고장이 아니라 게임기의 돈통이 25센트짜리 동전으로 꽉차 있었던 것이었다.
퐁은 실제로 그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대학생들은 밤새워 즐기던 핀볼대신 퐁 게임기에 매달렸다. 마이애미 대학의 어떤 학생은 1주일 만에 기계 한 대에 25센트짜리 동전 30개를 쏟아 부었다.
부시넬은 이 소식을 듣고 게임기의 성공을 직감했다.
퐁은 다른 동전넣는 오락실 게임기보다 4배나 되는 동전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 우리가 이 게임기를 제조하고 유통시키는 거야.”
원래 퐁 게임기의 라이선스를 미드웨이나 밸리테크놀로지같은 게임사에 팔려고 했던 부시넬은 생각을 바꾸었다.
게임은 TV뉴스에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게임업계의 경쟁자들은 너도나도 달려와 앤디 캅의 선술집에서 퐁을 보고들 갔다. 3개월이 지나자 너팅어소시에이츠(Nutting Associates)같은 회사들이 퐁의 유사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1
년도 안돼 아타리가 공급한 게임기 판매대수는 8500대로 늘어났다. 1973년까지 2500대의 주문에 대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까지 아타리 퐁의 공급대수는 8000대를 넘어섰다. 인기가 치솟는 가운데 아타리는 퐁 게임기를 생산비의 3배나 되는 가격에
팔았다. 3만5천대를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퐁의 인기와 비례해 게임기업체들의 유사품도 쏟아져 나왔고 이또한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아타리는 양산시설을 갖추었고 1973년까지 외국업체와의 제휴를 통해 수출하는 정도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속 제품들이 이어져 나왔다.
부시넬의 대학시절 꿈은 퐁으로 실현됐고 이는 엄청난 성공이라는 결실을 거두었다.
스티븐 켄트라는 작가는 퐁의 성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타리가 판 것은 유사품을 포함한 전체 퐁 게임기의 3분의 1도 안된다.”
부시넬은 유사제품으로 시장에 참여한 경쟁자들을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자칼(Jackal)'로 표현했다.
■가정용 비디오게임 홈퐁(Home Pong)으로 인기를 이어가다.
모든 최초의 성공작은 후속작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퐁의 인기를 업은 아타리의 엔지니어 해롤드 리(Harold Lee)는 1974년 인기있는 오락 게임을 TV화면에서 즐길 수 있는 가정용 퐁게임기로도 개발하고 싶어했다.
그는 가정용 TV에 연결해 사용하는 가정용 퐁 버전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아케이드 게임, 즉 오락실 게임기를 대신할 가정용 비디오게임기인 홈퐁(Home Pong)의 시작이었다.
프 로젝트 명은 아타리에 근무하는 매력적인 여직원의 이름을 따 ‘달린(Darlene)’이란 코드명으로 정해졌다. 해롤드 리가 낮시간에 설계 로직작업을 하면 앨콘이 밤시간에 설계에서 버그를 없애는(디버깅) 작업을 했다.여기에 동료 엔지니어 밥 브라운이 가세해 도와주었다. 최종 설계제품은 수백개의 전선으로 연결된 가정용 게임기였다.
그리고 이 원형제품은 나중에 하나의 칩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1974 년 마침내 게임기용 칩이 가정용 비디오게임기 홈퐁에 설치됐다. 당시 가전제품에 사용되는 것을 포함해 가장 앞선 칩이 가정용비디오에 적용됐다. 이 칩은 많은 회로를 집적한 회로(IC)로서 오락실용과 달리 컬러화면을 지원했다. 게임컨트롤러 위의 양쪽에 패들이 달려있었다.
앨콘과 밥 브라운이라는 엔지니어가 개발을 맡았다. 하지만 개발이 끝나자 제품판매는 이들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유통파트너가 필요했다.
그러나 최초의 가정용 게임이 오딧세이가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게임기 유통상들도 아타리사의 홈콘솔 ‘퐁’을 주문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부시넬과 진 립킨 판매담당 부사장이 홈퐁을 팔겠다는 장난감 전자유통상의 접촉을 받았지만 협상에선 결국 거절당했다. 유통상은 이 제품을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할, 너무 비싼 제품으로 보고 있었다.
아 타리는 마그나복스 오딧세이 광고가 이 백화점의 스포츠제품섹션에 있는 것을 알고 스포츠제품 부를 접촉했다. 분명 탁구비디오게임도 스포츠이긴 했다. 퐁에 열정적 관심을 가진 톰 퀸(Tom Quinn)이라는 매장책임자는 아타리에게 독점 거래를 요청해 왔다. 다른 곳에서 더좋은 조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부시넬 일행은 이를 거절하고 장난감 유통상을 찾았다.
1975년 1월 아타리 직원이 뉴욕에서 열리는 무역전시회에 홈퐁 부스를 만들었지만 주문을 이끌어내는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전시회에서 부시넬은 다시 퀸을 만났다. 이어 며칠 후 그와 미팅을 갖고 판매주문 협상을 했다.
“크리스마스시즌까지 7만5천대를 생산해 주겠소.”
부시넬이 톰 퀸에게 말했다.
“그 두 배를 만들어 줄 수 있나요?.”
“좋습니다.”
사 실 아타리는 7만5000대를 생산하기에도 벅찼다. 하지만 부시넬은 이를 알면서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실리콘 밸리의 투자자 돈 밸런타인(Don Valentine)에게 투자를 받아 새로운 홈퐁 생산공장에서 시어스 로벅 백화점의 주문에 따른 물량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1975년 시어스 카탈로그에 홈퐁 콘솔 소개 광고가 떴다.
아타리 최초의 생산품은 시어스의 ‘텔레게임스(Tele Games)’란 이름으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홈퐁은 당시 100달러, 현재 시세로 500달러에 큰 인기를 누리며 날개돋친 듯 판매됐다.
게임기에 내장돼 있던 소프트의 프로그램 롬을 카트리지에서 제거하고 외부로부터 공급할 수 있게 한 설계가 폭발적 인기의 비결이었다.
결국 아타리의 홈퐁은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 시어스백화점에서 15만대나 팔리며 만원사례를 하게 된다. 그 해 가장 좋은 품질상(Sears Excellence Quality Awards)도 홈퐁의 차지였다.
이어 1976년에 아타리는 자체 브랜드로 홈퐁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홈퐁이 성공리에 팔리자 아타리에 앞서 오딧세이 홈콘솔을 내놓았던 마그나복스도 그들의 오딧세이게임기를 단순화시켜 내놓기 시작했다.
GI(General Instrument)가 발매한 AY-3-8500칩으로 퐁의 유사품을 만들기가 손쉬워지자 게임업체들이 너나없이 참여해 게임기업체들의 헐값 판매가 횡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정용비디오게임기 시장의 성공에 자극받은 일본의 화투제조업체로 시작한 닌텐도가 1977년 컬러TV용 게임6(Game6)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는 6가지 종류의 다양한 테니스게임으로서 결국은 아타리의 퐁을 본뜬 것이었다.
오
늘날의 닌텐도가 비디오게임에 참여해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에 앞서 2D 비디오게임기시장을 주름잡게 된 계기가 된 셈이다. 닌텐도는
이때 마그나복스의 게임라인선스를 받아 제품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퐁의 성공은 많은 게임기 업체들에게 게임산업은 수지맞는
사업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아타리사는 자사의 아타리2600 홈비디오콘솔을 통해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회사가 됐다.
■소송...그리고 성공한 최초의 비디오게임기 퐁의 몰락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퐁이 한창 잘나가기 시작하자 오딧세이의 저작권자인 마그나 복스가 아타리를 상대로 소송을 해 왔다.
랄프 베어 (Ralph H. Baer)라는 발명가가 만든 마그나복스 오딧세이라는 게임기는 퐁의 개발에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었다.
랄 프 베어가 일하는 방위산업체 샌더스 어소시에이츠사는 마그나복스와 오디세이에 대한 배타적 2차 라이선스권 계약을 맺고 있었다. 샌더스는 이후 3년간 아타리를 압박했고 1975년 마그나 복스는 아타리에 대해 소송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아타리 홈퐁 복제품을 만든 발리, 미드웨이,시카고 다이내믹스 같은 복제품 제조사들도 포함돼 있었다.
아타리 등이 지난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베어스의 전자탁구게임의 개념과 그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소송 결과는 자명했다. 아타리의 변호사는 소송관련 비용만 150만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투자받은 금액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마그나복스가 아타리에게 요구한 특허라이선스료는 70만달러에 이르렀고 결국 이 금액을 배상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그나복스는 향후 개발될 아타리의 제품에 대한 권한까지 갖게 됐다.
1976년 시카고 법원. 아타리는 결국 존 그래디 판사가 주재하는 재판정 밖에서 마그나복스와의 화해에 이르게 된다.
아타리는 마그나복스가 아타리의 제품에 대한 권한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제품 출시를 1년간 연기하기로 했다. 1년 만에 나와야 하는 제품이 2년 만에 나오게 되면서 시장반응이 좋을 리 없었다.
“아
타리사에서 워너사는 계속해서 20억달러 이상 판매고를 기록하려 했지만 거기에 남아있던 누구도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존심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제품들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고 어떻게 마케팅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새제품을 소개해야 할 시간이 왔을 때 이들은 비현실적인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제품은 아무것도 실험실 밖으로 유출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새제품을 출시하지 못해 죽은 것이다. 정말 보기가 딱했다.”
후일 부시넬은 그렇게 회고했다.
■아타리의 영향과 유산
눈깜짝할 새 20개의 다른 핑퐁게임들이 시장에 등장했다.
게다가 아타리사에서 퐁의 복제품이 시장에 진임할 때까지 퐁의 상표를 등록시키지 않아 스스로 상표권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경영은 더욱 악화됐다.
몇
개의 회사들이 퐁을 복제하고 그 이름을 사용해 더 낮은 가격에 제품을 팔았다. 다른 회사들은 별도의 컨트롤이나 네사람이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색깔이나 속도의 변화등을 지원하며 더 낮은 값에 제품을 팔았다. 퐁의 기적적인 성공에 대해
무임승차하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이 지나치게 단순한 게임 퐁과 아타리는 70년대 말까지 여전히 업계 1위를 유지하면서 괜찮은 수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런 부시넬은 박수칠 때 떠나고자 했다. 아타리가 싸구려모조품 퐁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장단에 있는 조건으로 2천800만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때마침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거인 워너(Warner)사가 그에게 회사매각을 제의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사장단의 회장으로 남아 있던 그는 2년뒤 부자가 되어 아타리를 떠났다.
그의 판단은 결론적으로 올바른 것임이 드러났다. 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타리의 몰락이 시작됐다.
1970년대 말 훨씬 더 복잡한 신세대 컴퓨터 게임들이 많은 아타리 모방자들에게서 개발되고 있었다. 퐁은 서서히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고 있었다.
1983년이 되자 아타리사는 5억3,80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워너는 마침내 회사를 팔았고 전설적 게임 아타리는 경쟁사는 물론 슬금슬금 밀려드는 애플컴퓨터와 IBM PC의 게임 앱시장에 대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퐁이라는 이름과 자사 프로그램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지 못했다. 모방자들은 이 혁신적인 사업에서 돈을 벌 수 있었고 아타리에게는 손해를 끼쳤다.
하지만 퐁의 뒤를 이어 본격적인 2D게임기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시장에는 세가, 닌텐도 등 쟁쟁한 일본의 아케이드게임과 홈비디오 게임업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퐁은 최근까지도 세가 메가드라이드, PS포터블,닌텐도DS, 그리고 PC 등에 포팅돼 여전히 명맥을 잇는 가장 인기있는 게임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jklee@zdnet.co.kr 이재구 국제과학전문기자 저작권자 © ZDNet Korea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