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呈才 振興方案
文 一枝
궁중정재(宮中呈才)란 국가기관에 예속된 의식무용으로 궁중의 향연이나
국민을 위한
연향이나 왕후장상들의 완상(玩賞)으로 추어진 춤이다.
정재(呈才)라는 뜻은 원래 재주를 드린다는 말로 이것은 비단 춤 뿐만
아니라 땅재주,
줄타기 등등 모든 재예(才藝)를 드린다는 뜻이었는데 이것이 차츰 궁중무용(宮中舞踊)의
대명사처럼 통용하게 된 것이다.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에 보면 정재(呈才)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계(中國系)
의 곡조(歌), 악기(樂), 춤(舞)을 모두 당악(唐樂)이라고 했고 우리나라의 것들은
그것에
비해 향악(鄕樂)이라고 하였다. 통일신라이후 고려시대에 걸쳐 당나라의 문화가 흘러들어
옴으로써 전래하던 원래의 우리의 것들과 구분되어 당시(唐詩)에 대하여 향가(鄕歌)라는
말이 생기고 당악(唐樂)에 대해 향악(鄕樂), 당악기(唐樂器)에 대해 향악기(鄕樂器),
당악
무(唐樂舞)에 대해 향악무(辯樂舞)라고 하였으며 향(鄕)은 우리나라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당악무(唐樂舞)와 향악무(鄕樂舞)라는 명칭으로 양립하게 되었는데 그후
태
종실록(太宗實錄)을 보면 태종2년(太宗2年:서기1402)에 궁중무용을 정재(呈才)라는
용어
로 사용하면서 그뒤로 성종24년(서기1493년)에 편찬된 악학궤범(樂學軌範)을 비롯하여
각종 진연(進宴), 진찬(進饌), 진작(進爵)과 각정재무도홀기(各呈才舞蹈笏記)등을
보면 모
두 정재(呈才)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당(唐)나라 이후 송(宋)나라에서
들어온
외래의 춤을 당악정재(唐樂呈才)라하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춤을 향악정재(鄕樂呈才)라
고 한 것이다.
궁중정재(宮中呈才)에 관한 기록은 중국사서(中國史書)등에서의 단편적인데서
부터 악
학궤범(樂學軌範), 각정재무도혼기(各呈才舞蹈笏記),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작의궤(進爵
儀軌),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삼국유사(三國遺事),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궁원도감
(宮園儀), 시용무보(時用舞譜), 왕조실록(王朝實錄) 등 비교적 여러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한 문헌들의 내용이 좀 더 소상해주길 바라는 바이지만 그나마 한점
기록도 없이
민간에 흩어져 맥이 끊어져서 건져보기도 힘든 다른 민속류의 춤들에 비하면 그래도
다
행스러운 일이다. 뿐만아니라 1920년대까지 궁중정재가 축소된 상태나마 이어졌었고
해
방 이후에 구왕궁아악부가 1951년 국립국악원으로 개칭되면서 제대로 궁중무악(宮中舞樂)
의 보존과 전승이 이루어졌으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출신의 김천흥선생님,
성경린
선생님, 장사훈 선생님, 김기수 선생님, 이강덕 선생님 등이 계셨음으로 현재까지
맥을 이어
주고 있다.
특히 김천흥(金千興)선생께서는 15세 때 무동(舞童)으로 순종황제(純宗皇帝)
50회 탄
신축하연 때 직접 춤을 추었고 또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과 처용무(處容舞)의 인간문화
재로서 오늘의 많은 무용가들에게 궁중무(宮中舞)를 전승시키면서 문헌에 의한 문자와
그림도면(圖面)에 의해 살아있는 춤으로 재현하고 계신다.
현재 몇몇 무용가들이 문헌에 의한 재현작업에 힘쓰며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나 그
것은 어디까지나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에 기초를 두고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정재
(呈才)의 생명보호는 국악원의 제일(第一)의 의무이며 권한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동안 보면 정책적으로도 궁중무악(官率舞樂)의 전승에서 무(舞)의 분야는 악(梁)의
분
야보다 소홀히 취급된 점이 많았으며 국악원의 무용단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연주
단(演奏團)보다 늦었고 인재(人才)의 발굴 육성면에서도 음악쪽보다 약한 편이다.
이제 우리의 궁중정재(宮中呈才)를 진흥 육성하기 위해서는 보존사업과
그것을 바탕으
로 한 발전사업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전통의 문화경험 없이는 그 어느 다른것
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며 더욱 발전된 그 어느 상태로도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가까운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60년대의 가부끼와 80년대의 가부끼가
크게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가부끼가 세계 속에서 상당히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통을 그만큼 살려내고」있기 때문인 것이다.
전통이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더 크게, 더 많은 숨결, 더 많은 생생한
생명을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항상 오늘의 인간들이 갖고 있는 숨결로써 이해할 수 있는 원초적인 것과 이어져
내려오
는 전통적인 생명들을 옛날의 어떤 살아 있음들에 대한 사랑과 이해와 정보가 총체적으로
자주 전통에 보태어져야 될 것이다. 이를테면 옛날에 A라는 지역에 살풀이라는 춤이
있
었고 B라는 지역에 살풀이 춤이 있었다가 이 두가지가 하나로 합쳐져서 자연스럽게
어떤
C라는 살풀이로 전해져 내려왔다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C라는 살풀이를 이어받아
하면
서도 역사적인 다른 면도 함께 공부하면서 보며는 그 이전의 살풀이인 A의 요소를
발견
할 수 있고 B의 요소에도 닿아볼 수 있음으로 결국 전통 위에다 생명을 더 크게 불어
넣
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남아 있는것 이상의 것을 알 수 있는 이메지네이션
(Imagination)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조 말의 사람들이 못보던 것을 우리는
그
것을 고려시대에 가서 보고 신라시대에 가서 볼 수 있고 더 올라가 단군시대에 가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전통(傳統)이라는 것의 문제는 "있는 것을 이어받아서
지킨다"의
의미가 아닌, 새롭게 항상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새로운
생명이
라는 것은 외래의 것을 한순간 집어 넣는다든지해서 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
적인 것을 파헤쳐 나가면서 전통의 맥을 따라서 자꾸만 짚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컨
대 어느 것 하나를 김씨가 이씨에게 가르쳤고 이씨가 박씨에게 가르쳐서 현재에 전해
이
르렀다고 했을 때에 그러면 김씨는 누구에게서 배됐으며 어떻게 어떤 것을 익혔나를
살펴
보려 할 때에 그 이전(以.前)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역사적인 개념에 의하며는
우
리는 박씨, 이씨, 김씨를 거슬러 올라가 그 전(前)까지도 파헤쳐볼 수 있을 것이며
더 그
이상의 최씨까지도 올라가 볼 수 있고 최씨라는 발판을 딛고 그 위에 허씨를 또 하나
찾아
낼 수 있다고 할때 그것이야말로 바로 올바른 전통의 계승작업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이미 꾸며져 있는 것을 옹졸하게 오늘날 남아있는 형태로만
그것을 그
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남아 있는 형태 속에서 역사를 파헤치고 양식을
파헤치
고 그 모든 것을 무용의 크기로 해서 우리가 줄기를 짚으며 하나로 꿰뚫을 수 있는
어떤
시각의 넓이와 깊이를 자꾸만 더해 가면서 파헤쳐봐야 하는 것이다. 전통의 계승을
하는
데는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며 또 있었던 것을
찾
아 내는데에는 결코 창의력 없이는 못찾아 내는 것이다. 창조적인 정신없이 또 창조적인
비젼이 없이는 또 창조능력을 발휘, 수행할 수 있는 뒷받침이 없이는, 그리고 이상(理想)
이나 창의력같은 그 어떤 예술창조와 직결되는 막강한 정신적인 요소가 없이는 전통이
제대로 계승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전통의 진흥이나 창작이라고 할 때에 오늘날에
남아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섞어서 그 재료를 이용해서 내 것을 만들어서 보여주느냐
하는
것은 발전된 것이 아니다. 바로 창작과 전통이라는 것은 한줄기에 핀 뿌리와 꽃이며
결
코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전통을 맡은 사람이나 창작을 하는 사람이나 전통에의 역사적인 시각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창작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자연도 역행해보고
인간의
섭리도 어겨보고 큰 것을 작게도 표현하고, 작은 것을 크게도 표현하면서 모든 것을
뒤
바꿀 수 있는 것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한다 하더라도
결국 전통이라는 것이 우리의 숨결 속에 체질 속에 숨어들어가 있는 것이며 또 그
바탕
이 든든할 때 무언가 새로운 언어나 테크닉이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전통이란 것을 창작정신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한낱 전승하여 이어지게만
한다는
개념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어지게만 한다면 처음엔 동아줄이었다가 그 다음엔 새끼줄이
었다가 마지막엔 노끈밖에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겨우 이어지긴 한 것이지만, 그러나
전
통이란 처음에 있었던 동아줄을 점점 더 굵은 동아줄로 단단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며
처
음에 노끈이나 새끼줄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오늘날의 동아줄을 내가 갖고
있어
야 하는 바로 이것이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 믿어진다.
우리가 현재 다소 경제가 흥했다고 해서 옛날을 원시적(Primitive)으로
비뚤어지게 바
라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옛날을 바라볼 때 그전 것을 왜소하고, 가난하고, 소규모의
축소
상태로 보는 오늘날의 문화인들이나 지식인들의 과거를 돌아보는 시각이야말로 대규모의
착각인 것이다. 실상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역사상 사색당쟁을 겪었다든지
삼
국이 정립이 됐다든지 고조선이, 위만이 등등,그 모든 것이 빼앗기고 무너져 내렸을
때에
도 역사상 지금처럼 영토가 적은 때는 없었다. 실상 이러한 영토의 문제 한가지만
가지
고도 우리가 이어받은 것들을 축소만 시켰을 뿐이지 전통을 증폭시켜서 가느다란
것을
굵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현상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옛날 것은 가난했었다는 왜소한
생각은 버려야할 것이다. 오늘날의 인기있는 각양각색의 어느 옷감도, 색상도 옛날
명주
를 가지고 갖가지 비단들을 지금 다 만들지도 못하고 있는, 그 색상을 내어 보지도
못하
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오늘을 결코 자랑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생각
은 옛날 것은 무조건 좋다든지, 찬양 한다든지의 어떤 단순한 복고적인 개념에 의해서
옛
날로 가보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옛날을 옹졸하게 묶어주려고 하지말고 비젼을 가지고
바라보며 우리의 역사를 찾아내고 자신의 문화를 인식할 능력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발견되고 발굴된 것을 그대로 배워서 화석화 시키지 말고 우리에게 행여
잃어
버린 정신은 없는가? 과연 이것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나 하는 것을 점점 더 역사적으로
파고들면서 전승하는 것이야말로 전통의 진흥일 것이다. 우리가 전통을 발전시키고
창작
하려면 외래의 것을 당연히 알아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재료로
삼을 수는 없다. 결코 전통조차도 좁은 의미의 원자재는 괼 수 있을지언정 재료로
삼을
수는 없다. 흐트러진 조각들을 모아다가 만들어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
보다는 그 조각이나 잔해의 원자재는 무엇으로 만들었나를 살펴 보아야 실은 창작이
나온
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국립국악원이 官주도로 일한다고는 하나 순수예술인이 원장의 자리에
있음으로 해
서 그 어느 단체보다도 명실공히 국악당에 자리잡으며 우리의 궁중정재를 철저하게
제대
로 펼쳐 진흥시킬 수 있을 것이기에 부럽고 감사한 것이다. 여태껏 학문적인 면과
실기
적인 면의 병행으로 일인 다역을 해오신 김천흥 선생을 중심으로 한 몇몇의 연구원이
보
완되어 정재(呈才)를 더욱 진흥시키기 위한 연구분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춤 하나를 제대로 발굴하기 위하여 역사적인, 영토적인, 미학적인, 의상학적인,
색조적인
등등 그밖의 더 많은 재료를 들추어 나가야 하는 것이 그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립국악원만이 할 수 있는 여유이고 성공해볼 수 있는 여건임에 대하여 당연한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우리 춤을 감상하는 이나 이론 분석연구가들은 서양무용은 하체(下體)중
심이고 한국 춤은 상체(上體)중심이라고 분석하지만 전통 춤을 직접 추면서 우리에게
가르
치는 스승들은 한결같이 다리 힘, 발사 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보는
것과 추
고 있는 것의 차이며, 이론과 실제의 간격이다. 궁중무용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인
다리 힘의 중요성을 아는 소중한 분이 생존해 계실 때 우리는 부지런히 그 생명 줄에
의지
해서 단 하나의 정재라도 제대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부디, 춤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사회상이나 여러 측면에서 보여지는
여건들도 들
춰 조사 연구하며 그에 준해 따르는 다른 분야의 문헌도 함께 병행하여 정리하며
춤의
생명을 살리는 연구원들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더 많은 고유한 특징과
새로운
춤사위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