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조보고서 전문 명성황후 시해 에조 보고서

기출문제 2014. 3. 4. 16:12 |

에조보고서 전문 명성황후 시해 에조 보고서

에조 (英臟) 보고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명성황후 시해 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 에조 보고서 〉를 근거로, 일본 군인들은 황후를 죽이기에 앞서 능욕했다는 주장

에조 보고서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에조란 한 일본인의 보고서로 을미사변 직후 바로 작성되어
스에마쓰 법제국장에게 전달된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본 관련자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쓴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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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英臟) 보고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중략…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 로 시작되는 에조(英臟)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그 동안 역사학계 일부에만 알려져 있었다. 이 보고서에 의거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하여 '능욕(凌辱)'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으나, 그 존재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2002년 작가 김진명씨가 끈질긴 추적 끝에 찾아냈다. 이 문서의 전문을 살펴보면 근대 일본의 기초를 형성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살해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다 못해 아연실색(啞然失色)하게 한다.

에조는 누구인가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사진)는 일제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조선정부의 내부(요즘 내무부)고문관이었다고 한다. 조선정부 내부 고문 직책이란, 그가 조선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입궐한 정식 직책이 아니라 당시 일제가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라 일본인들이 명목상 가지는 직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 (角田房子)여사도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 " 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명성황후 시해에 성공한 일제는 1895년 10월 8일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육군참모부에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 라는 문구에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전문 한 장을 보냈다. 그것은 일본 정부에 명성황후 시해 성공을 알린 공식적인 라인을 통한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는 1895년 10월 9일.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날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조선에 들어오기 전 "법제국 참사관"을 지낸 관계로 전직 상사인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장문의 비밀보고서를 보냈다. 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 총지휘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현재 "일본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헌정사편찬회문서 (憲政史編纂會文書)>"에 보관 중으로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에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 분량이다. 


에조보고서는 역사조작.역사모르쇠 지향주의 일본의 정식보고서와 달리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작가 김진명씨는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격이 다른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다시 말해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의 발견  


명 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던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1905∼1977)다. 그는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발간하면서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 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라고 기술하여 최초로 명성황후 "사체 능욕" 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것이 바로 그 후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또한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에서도 잠시 등장한다. 이 대목도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된 것임은 물론이다. 한편 국내에서 명성황후 능욕설이 제기된 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야마베 겐타로의 첫 번째 책이 <일한합병사>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온 이후로 보인다.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살해했다.  


에조보고서에는 “황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 황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 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 황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에게 보인 데다, 외국인들과 언쟁까지 벌인 일,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 김진명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모 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 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역사학자들 사이에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일부 증언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조작하여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에이조 보고서)의 원문 및 번역

末松法制局長宛石塚英藏書簡
韓國政府顧問たりし石塚より王妃事件の眞相を報告せるもの
書簡用卷紙に墨書(明治 二八年 十月 九日 附)
伊東伯爵家文書 朝鮮王妃事件關係資料 


한국정부 고문으로 있던 이시즈카 에이조가 스에마쯔 법제국장앞으로 왕비 사건의 진상을 보고한 서간으로 서간용 두루마리에 먹으로 씀(메이지 28년 10월 9일부) 


이토 백작가 문서 - 조선왕비사건 관계자료 


敬 啓其後は益御淸福張爲入奉恐賀候處當地昨朝之出來事は旣に大要御承知濟之御事と奉察上候 王妃排除之儀は若し時機の許すあらば之を決行したるとは 不言不語之間に誰人も抱藏したる考に可有之候得共若し一步過たば忽ち外國之關係を惹き起し永遠に國に占むる日本之地步を亡失するは必然の儀なれば深く輕率 を戒しむべきは今更申し越す?も無之儀に御座候今回之事小生共最初より少しも相談に與からず却而薄薄其計劃を朝鮮人より傳聞致候程に有之段段聞知する所に 依るに局外者にして其謀議に參與し甚しきは?次焉連が兵隊之先鋒たりし事實に有之候而して
其方法は輕率千万殆んど兒戱に類するなきやと思わるるも無之にあらず幸に其最も忌わしき事項は外國人は勿論朝鮮人にも不相知候樣子に候 現公使に對しては聊か不德義之嫌有之候得共一應事實之大要御報告仕るは職務上之責任と相考候間左に簡單に申陳候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어제 아침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는 벌써 대략 아시겠지요? 


왕 비배제(排除)의 건을 시기를 보고 결행하자는 것은 모두가 품고 있었던 생각이지만 만일 잘못하면 바로 외국의 동정을 일으키고 영원히 여러 나라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잃을 것이 당연한 것이므로 깊이 경거망동하지 말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이 번 사건에 대하여는 저는 처음부터 모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만 어렴풋이 그 계획을 조선인으로부터 전해 들어서 조금씩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국외자로서 그 모의에 참여하여 심지여는 浪人(낭인)들이 병대(兵隊)의 선봉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경솔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거의 장난[兒戱]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데 다행히 그 가장 꺼림칙한 사항은 외국인은 물론 조선인에게도 서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현 공사에 대하여는 조금 예의가 없는 느낌이 들지만 일단 사실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고드리는 것이 직무상의 책임일까 생각해서 아래와 같이 간단히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1.發端 (발단)  


王妃排除の必要は三浦公使も夙に深く感ぜられたるものの如し而て其今日に之を決行したる所以は「危急の場合に露の援兵を請うべきの約束」?に 「訓練隊解散の計劃」を宮內府に於て爲したるに由るものの如し (?ち訓練隊を利用したるなり) 


왕 비를 몰아낼 필요성은 미우라 공사도 이미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필 오늘 이것을 결행한 이유는「위급의 경우에 러시아의 원군을 청할 약속」및 「훈련대를 해산한다는 계획」을 궁 내부에서 세웠기 때문인 듯 합니다.(그래서 훈련대를 이용한 것입니다. 


2. 名義 (명의)  


訓練隊解散 兵器沒收の內議を聞くや已むを得ず太院君を要し大內に哀訴せんとして侍衛隊に衝突を來したり王城前に在る守備兵は之を鎭靜せんが爲め四門の警備に從事したると云うに在り  


훈련대 해산 , 병기 몰수의 의논을 듣자 부득이 대원군을 앞세워 대내에 호소하고자 해서 시위대에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왕성의 수비병은 이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4문의 경비에 종사했다고 말합니다. 


3. 謀議者 (모의자)  


推察するに岡本は主唱者たるの如し 大院君の入闕を斡旋したるは正しく同人なり 外に柴 楠瀨 杉村は密議に參與したりと云う 其他は少しも關知せず 守備隊長馬屋原の如きは命令的に實行の任に充られたるが如し 


미 루어 생각해볼 때 오카모토(岡本)가 주모자인 것 같습니다. 대원군의 입궐을 알선(斡旋)한 것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이외에 시바(柴), 크스세(楠瀨), 스기무라(杉村)가 비밀 모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기타는 적어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수비대장 마오하라(馬屋原) 같은 사람은 명령으로 실행의 임무에 충당된 것 같습니다.  


4.實行者 (실행자)  


此荒仕事の實行者 は訓練隊の外守備兵の後援あり(後援は或は當からざるが如し)尙ほ守備兵の外に日本人二十名若あり熊本人多數を占(漢城新報社迹)中に新聞記者數名又醫師 商人もあり 隨て洋?和?相混ぜり 岡本は大院君と同時入城し實行の任に當れり 守備隊の將校兵卒は四門警衛に止まらず門內に侵入せり 殊に?次馬連は深く內部に 入입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油を注ぎ燒失せる茅 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云う 右は士官も手傳へたるも主として兵士外日本人の所爲に係るものの如し大凡三時間余を費して右の荒仕事を與したる後右日本人は短銃又は劒を手にし徐徐として 光化門 (王城正門)を出て群集の中を通り拔けたり 時已に八時過にて王城前の廣小路は人を以て充塞せり  


이 막된 짓의 실행자는 훈련대 외에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습니다(혹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쯤이 있었습니다. 구마모토(熊本) 현 출신자가 다수를 점하며(漢城新報社 迹) 그들 중 신문기자 몇 명과 의사·상인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서양식 옷을 입은 사람과 일본 옷을 입은 사람이 서로 섞여 있었습니다. 오카모토는 대원군과 동시에 입성해 실행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수비대의 장교와 병졸은 4문의 경위(四門警衛)에 그치지 않고 대문 안으로 침입했습니다. 


▲ 1895년 '리옹프와이어'신문에 실린 삽화. 한 일본인이 명성황후의 음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특 히 낭인들(野次馬達)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고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습니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 --可笑又可怒 / 웃을 일, 또한 노할 일-- 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 어렵습니다. 그 외에 궁 내부 대신을 몹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습니다. 


위 는 사관도 도와주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습니다. 대략 세 시간여를 소비하여 위 막된 짓을 저지른 후 일본인들은 권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서서히 광화문(왕성 정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 갔습니다. 그때가 벌써 여덟 시가 지났고 왕성 앞 대로(광소로)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 명성황후 시신을 소각하고 있는 장면의 상상도. 살아있는 여인을 불태운 것으로 보인다.     


5.外國使臣 (외국사신) 


米 露兩公使は宮闕內に於ても大院君及三浦公使に向けて頻りに質問し尙ほ同日午後は各國使臣相續き日本公使館に來り 一一を擧て難問し夜に入て各各歸館したり 三浦公使弁解頗るめ結局雙方水懸論なるも當方は余程の痛みを感ずる廉なきにあらず 折惡しく或米人現場を目擊し居りにあらずへば普通一般之朝鮮人之?言之如く一槪に抹殺し去るを得め結べく乍去三浦公使の弁解も亦頗る上出래なるl言之(公 使之談話に依れば)又大院君始め各るも當堅く約して日本に不利ならざるの返答を爲し居れり然るも遂に?際問題たるを免れざるべし 


미 국, 러시아 두 공사는 궁궐 내에서도 대원군 및 미우라 공사를 향하여 빈번히 질문해 다시 같은 날 오후에는 각국 사신들이 같이 일본공사관에 와서 하나하나 증거를 가지고 힐문하다가, 밤이 되어 각각 귀관했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서둘러 수습하려고 아주 노력하여 결국 서로가 이치만 따져 끝이 안 나는 논쟁이었지만 저(當方)는 너무나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 행하게도 어떤 미국인(米人)이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고 하니 보통 일반 조선인의 증언처럼 일방적으로 말살해버릴 수도 없지만, 미우라 공사의 수습 역시 아주 잘한 것 같습니다. (공사의 담화에 의하면) 또한 대원군을 비롯한 각 대신들은 굳게 약조해 일본에 불리하지 않게 답변했습니다. 그렇지만 국제문제화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6.影響 (영향) 


りに當地に 於ける外國使臣間之談話にて要領を得て國際問題とならざるも夫の遼東問題には必ず影響を與ふるに至るべし 尤も公使は困難なる場合には免官せられ不苦と被中候得共公使之辭任豈能く國際紛議を解かん要するに王妃が從來改革之妨害たる事は小生共之夙夜憤慨に堪えず 打過候事なれば此斷然なる處分を 喜ぶと同時に其方法の宜しきを得ざりしを深く惜まざるを不得と存候, 公使は右の?次馬連中に對しては表面上夫處分を施さるの事ならん 乍去諸外國之困難を排除し得べきや否疑なき能はず 勿論此る荒仕事之事なれば多少「ボロ」を現はすは免れざる所なりと雖今回之事余り「ボロ」多からざるか右は前記に申陳候如く三浦公使に對しては甚不信實之 至には候得共 職務上之義務に馳られ不得已御報道申上る次第に御座候 右何卒篤く 


만 일 이 땅(當地)에서 외국 사신들 사이의 담화로 마무리되어 국제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그 요동 문제에는 곧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공사는 곤란한 경우에는 면관(免官 관리의 자리에서 물러남)되며, 공사의 사임은 아마도 국제 분의를 잘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왕비가 종래 개혁의 방해인 사실은 저도 밤낮으로 분개하고 있었던 만큼 그 단연한 처분을 기뻐함과 동시에 그 방법이 적당하지 않았음을 깊이 아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 사는 위의 낭인들에 대해서는 표면상 각자 처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제외국의 곤란함을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런 막된 짓인 만큼 다소 ‘실수’를 하는 것은 면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번 일은 너무나도 ‘실수’가 많지 않았을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미우라 공사에 대하여는 극히 믿음직스럽지 못하겠지만 직무상의 의무에 쫓겨 부득이 보고드리는 바이니 부디 잘 봐 주십시오.  


十月 九日 英藏 末松 > 


10월 9일 에이조 스에마쓰